현대 정주영 회장 나훈아 베트남 호찌민
2001년 제가 투자할 때도 선지지수가 100을 오르락내리락하던 것이 60대까지 하향곡선을 보이고 끝없이 추락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90을 훌쩍 넘고 120을 돌파하듯이, 작년 10월만 해도
선지가 260을 오르내리더니 불과 몇 달 만에 지금은 215를 전 후해 등락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정말 역사는 돌고 돌며 주식의 흐름도 그렇게 가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주식도 역사처럼 그 길을 간다.
10부의 글을 쓰면서 정말 역사는 돌고 돌며 주식의 흐름도 그렇구나 생각해 봅니다.
당시 2001년 제가 투자할 때도 선지지수가 100을 오르락내리락하던 것이 60대까지 하향곡선을 보이고 끝없이 추락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90을 훌쩍 넘고 120을 돌파하듯이 지금이 그렇네요, 작년 10월만 해도
선지가 260을 오르내리더니 불과 몇 달 만에 지금은 215를 전후해등락을 거듭하고 있으니 참 무섭네요.
다시 선지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돌고 도는 역사처럼 바뀌고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은 쉬는 날이고 재미있는 다른 얘기 3 가지 해봅니다.
지난번에 삼성얘기했으니 이번엔 현대얘기해 봅니다.
제가 아는 분 중 현대자동차서비스사장을 하던 분의 동서가 있는데 그분께 들은 왕회장 얘기입니다.
고인이 되셨고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내 신분이니 조심스럽게 써봅니다.
어느 날 그 서비스사장을 하시던 분이 부산에 내려오신 김에 골프를 갔습니다.
아마 동래칸츄리클럽쯤으로 기억합니다.
골프를 다 치고 나오니 많은 분이 그 사장님께 인사를 하러 오셨습니다.
그룹사의 핵심기업의 사장, 대단한 자리임은 아마 여러분도 짐작하실 겁니다.
부산 경남 인근지역의 현대자동차 정비사업소 소장은 모두 왔으니 줄잡아 30여 명 적잖은 인원이 인사하였고
모두하나같이 봉투를 전달하며 모처럼 오셨으니 편히 쉬다 가시란 것입니다.
그 정도의 자리는 대단하니 능히 그 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이 정도면 톱스타의 자리 나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의 갈채를 받고 돈과 영예와 인기, 그리고 부러움, 이런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룹사 CEO나
연예인 모두 대단한 분들입니다. 그 자리까지 오기까지에는 실력도 운도 없이는 갈 수 없는 자리지요.
그런데 그분이 모시는 회장님은 왕회장의 아들로 아마 왕회장의 방북과 투자에 반대하신 분이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왕회장님은 북한에 자주 방문하시고 또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으신 것 다 아시는 얘기지요.
어쨌든 당시 몇 분의 아드님 중 어떤 분은 왕회장의 노선에 찬성을 했고 어떤 분은 반대도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룹의 자금이 북쪽으로 너무 많이 흘러가면 자금의 경색도 예상할 수 있고 또 왕회장님은 어릴적꿈도 이루고
아마 큰 그링을 그리셨는데 서로 간에 마찰이 조금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막 대놓고 자식을 나무랄 수는 없고 그 화살이 아마도 그 밑에 사람에게로 간 모양입니다.
어느 날 그룹회장단과 사장단의 중요한 회의 가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왕회장은 분노하며 그 서비스 사장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자네가 그렇게 내가 북쪽투자를 반대했다고 들었는데 자네 그렇게 내가 싫으면 자네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
그렇게 그분은 면직당했습니다.
쇼크로 한 달 정도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있었다 합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그분께 그위의 회장님이 배려를 해주어 겨우 생계유지를 하였다는 뒷얘기입니다.
톱스타 나훈아 씨 얘기하겠습니다.
요즘 말도 많고 탈도 많아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얘기는 모두 아시는 얘기고 정말 대단한 분이고
오랫동안 톱스타의 자리를 지킨 많은 분의 사랑을 받은 분인데 아직은 아무도 그분의 현실을 알 수 없지요.
나이는 저보다 4-5살 더 많은 분인데 그분이 저의 군대후배입니다.
공군 사병으로 저보다 6개월 정도 늦게 군에 입대 (당시 만 3년 근무)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늘 관심이 많았습니다.
공군에 입대한 배경은 신성일 씨와 가까운 그분이 당시 신성일 씨의 형이 공군의 높은 분으로 계셔
그분의 운전병을 할 계획이었으나 그분이 사고로 제대하였고 그래 고생을 하다 나중에는 군연예단에 가서 제대했습니다. 사천인가 에있을 때는 철도 하역병으로 근무했는데 당시에도 하루에 수십 명의 여자들이 면회를 하여
정상적 군생활이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가 제대 후 당시부인과 이혼하고 김지미 씨와 결혼해 당시 엄청난 화제를 일으켰고 기자들은
그 살림집이 있던 대전에 잠입취재를 하여 기사화하였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김지미 씨는 나훈아보다 많이 연상이었으나 당시 촤고의 인기연예인이었습니다.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기자가 어떻게 잠입했는지 몰라도 그들의 신혼집을 취재했는데'
김지미 씨가 잠옷바람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속살이 비치는 옷으로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몸매의 그라인은 영화에서 본 이상의 과연 정말 아름다웠고 젊은 나훈아 씨가 반할 정도의 일품이었다.
뭐 이 정도 얘기였지만 당시에는 그 반응은 굉장하였습니다.
그만큼 김지미 씨의 인기와 나훈아 씨의 인기가 높았던 거지요 참 나훈아 씨는 복도 많은 분입니다.
진시황제가 부럽지 않은 세월을 보냈으니 황기순씨전 부인과의 얘기등 끝없이 꼬리를 무는 이야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60 이 넘어 70을 바라보는 노인이 인제 그만하실 때도 되지 않었나 싶습니다.
화제를 바꾸어봅니다. 호찌민시(옛날 싸이공)를 방문했을 때 호찌민전 대통령의 유적지와 그의 유품을 보았습니다,
남은 것은 의자와 옷가지 몇 점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정치학자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청렴한 정치인으로 호찌민을 꼽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청렴한 지도자.
지금도 베트남 사람들은 어린애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그분을 이렇게 부릅니다.
호 아저씨.
정말 우리 민족은 지도자 복이 별로 없는 민족이었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새로이 시작되는 MB님 호찌민과 같은 청렴한 지도자로 우리에게 남아주기를 바라봅니다.
월요일은 장이 어찌 될까 궁금합니다.
다시 오를까? 계속하여 추락할까?
역사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돌고 돌며 주식도 역사처럼 그 길을 간다.
다시 뵙겠습니다..
이 글은 제가 한동안 전업투자자의 길을 걸었을 때 이 글을 읽고 위안과 희망을 받았던 글입니다.
남들과 소통할 수 없는 외로움과 불안 희열이 교차될 때 한 번씩 읽으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은 소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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